시간은 어느새 저녁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밖은 홍수라도 난 듯 비가 쏟아져 내리는 중이고 나는 추위에 몸을 떨고 있다.
오늘 집에 온다던 보일러 수리 기사는 아직까지 도착을 하지 않았다.
비가 많이 와서 내일이라도 오는 걸까...
이럴거면 연락이라도 미리 해주지. 그랬으면 기다리지도 않았을텐데...
나는 잠이나 자기 위해 침대로 가서 몸을 눕혔다.
보일러가 꺼져서 그런지 두터운 이불을 덮어도 추위가 느껴진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기에 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ㅡ 딩동ㅡ 딩동ㅡ
아으… 누구야. 스마트폰의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눈을 비비며 인터폰을 키자 한 남성이 문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누구세요?”
“수리기사입니다. 문 열어주세요.”
수리기사라고? 10시인데?
하지만 생각을 해보니, 늦은 시각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시각이었다.
나는 마침 추워서 잠을 못자고 있었기에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떨리는 양팔을 문지르며 문을 열자 30대로 보이는 남성이 웃음을 짓는다.
“죄송합니다. 오늘 날씨가 안좋아서 많이 늦었네요.”
“아... 괜찮습니다. 오래 걸리시나요?”
“아니요. 금방합니다.”
안심하라는 듯 그는 다시 입가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내가 보일러실로 안내하자 그는 장비를 꺼내 능숙하게 배관을 만지기 시작했다.
잠결에 눈을 비비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거실로 나와 쇼파에 앉았다.
창문 밖의 빗줄기는 한층 거세져 있었고 번개가 요란하게 치고 있었다.
올해 들어서 가장 최악의 날씨가 아닐까...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거실의 형광등이 '탁' 소리를 내며 꺼지더니 순식간에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지?
나는 쇼파에서 일어나 전등 스위치를 껐다 켰다 반복했지만, 형광등은 불이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실 뿐만 아니라 주방과 화장실에도 전기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분명 정전이었다.
일단 한치 앞도 안보여 스마트폰을 찾고 있는데, 불현듯 무언가가 내 옆으로 스르륵 지나갔다.
깜짝 놀라 제자리에 주저 앉고 나서야 집에 수리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잊고 있었다.
그런데 수리기사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는 말 없이 어둠 속의 거실을 어슬렁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쇼파에 앉더니 미동도 없이 움직임을 멈췄다.
왜 저러는 거야...
“저.. 저기요?”
그가 고개를 돌리는 듯한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인다.
“저기요...”
“정전이 되었나 보군요. 조금 기다리면 괜찮아질 겁니다.”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예… 아마도 날씨 때문에 그런 거 같네요. 하하.”
침대 위에 올려져 있던 스마트폰을 찾고 쇼파로 가서 수리기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째 정전이 되어서 그런 건진 몰라도 집이 더 추워진 거 같다.
수리 기사는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스마트폰이나 하기 위해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배터리가 없는지, 화면이 켜지지를 않는다.
아까 전에 분명히 배터리가 많았던 거 같은데…
한동안 생각에 잠겼지만, 그런다고 스마트폰이 켜질 리는 없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빗줄기가 한층 굵어져 이젠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갑작스레 이런 날씨에 모르는 남자랑 불 꺼진 집에서 뭘 하고 있나 생각이 든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상한 것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아파트들은 모두 불이 켜져 있다.
빗줄기 때문에 희미하지만 상가 건물에도 빛이 보인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과거에 여러 번 경험을 해봐서 알지만, 정전이 되면 모든 아파트와 상가는 전기가 동시에 끊겼다가 동시에 돌아온다.
우리 집만 정전이 되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수리 기사를 바라봤다.
그는 움직임이 없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한참 보았지만, 그는 정말 동상이라도 된 것마냥 미세한 흔들림도 없었다…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어딘가 으스스한 사람이었다.
아까 전에는 어둠 속을 혼자 배회하더니…
생각해보면 날씨도 안좋은데 10시에 수리 기사가 왔다는 사실도 의아하다…
어쩌면 전기가 끊긴 것도 이 사람과 관련이 있는게 아닐까?
머리 속에서 불길한 상상이 떠오르던 순간이었다.
수리 기사가 몸을 꿈틀대더니,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흠칫 놀랐지만, 잠시 후 보인 건 그의 스마트폰이었다.
그는 인터넷에 접속을 하였고, 곧 화면에서 뉴스가 재생되었다.
날씨도 안좋고 늦은 밤이라서 내가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건가…
그저 무뚝뚝한 사람이라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스마트폰의 뉴스를 나도 함께 보고 있는데, 수리기사가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귀를 간지럽히는 듯한 끔찍한 웃음이었다.
“끼히히히히히.”
왜… 왜 저러지? 화면 속에서는 앵커가 긴급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폭우로 인해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사망하였습니다. 오후 1시경에는 산사태로 8명이 숨졌고…]
“끼히히히히히히.”
[8시경에는 도로가 침수되어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습니다.]
“끼히히히히히히히.”
수리 기사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웃는 것이었다.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이 사람은 역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수리 기사는 숨이 넘어갈 듯이 웃기 시작했다.
“끼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그 때, 꺼져 있던 거실의 형광등이 번쩍하고 켜졌다.
갑자기 주변이 밝아졌기에 눈을 찌푸리며 감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순간, 얼마 안 가서 온 몸이 얼어붙었다.
수리기사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눈은 옆으로 쭈욱 찢어져 있고 볼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귀는 어디로 갔는지 형체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건 사람이 아니었다… 괴물? 아니면 귀신?
머리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내 몸은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수리 기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그것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알았는데 얼굴 뿐만이 아니었다.
신체 모든 곳이 뒤틀려 있는 상태였다.
그는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보일러실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쾅쾅쾅쾅!!
소리가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컹덜컹 내려 앉았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부엌으로 천천히 걸어가 식칼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정말 좋지 않았다.
그 순간 보일러실에서 수리기사가 나온 것이다.
온 몸이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저... 저기 그게... 제가 지금 급히 칼이 필요해서 이렇게 들고… 요리를 하려고...”
무슨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지 몰랐다.
술에 취한 것 마냥 몽롱했고 머리 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엉킨 상태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수리기사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미끄러지 듯이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안녕히계세요.”
그리고 그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칼을 쥔 채로 한참을 부엌에 서 있었다.
방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건지 파악이 안된다.
아무리 고민을 해보아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 새벽 내내 잠을 자지를 못했다.
날이 밝아오고 오후 쯤이 되고 나서야 두려움이 약간은 걷혀졌다.
그러자 한가지의 가설이 떠올랐다.
수리 기사가 나를 놀리려고 분장을 한 뒤, 저런 짓을 꾸민 것이다.
분노가 차올랐지만, 수리 센터에 전화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떨쳐내기 위해서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고 TV를 보았다.
하지만 수리 기사의 끔찍한 얼굴이 자꾸만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머리를 쥐어 잡고 있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스마트폰 화면을 보니 저장이 안된 번호였다.
이건 또 누구야… 별 생각 없이 통화버튼을 누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수리 센터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걸 끊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506호 이성현님 아니신가요?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네… 맞는데 무슨 일이시죠?”
“죄송해서요. 수리 요금은 환불해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세요?”
설마 수리기사가 장난을 쳤다는 나의 가설이 맞아 떨어진 건가?
하지만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남성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전 날에 수리 기사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게 날씨 안좋으니까 가지 말랬는데… 쯧… 결국 갔다가 죽어부렸네…”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 속이 백지가 된 채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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